다시 살아난 것은 내 좆대가리 뿐 벼락같은 춘성스님의 육두문자 깨달음
선(禪)의 키워드는 고정관념의 타파이다. 판단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인간의 에고(ego)가 가지고 있는 이원성(二元性)을 깨뜨려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관념 자체를 승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시비를 가리게 되면 옳음을 주장한다하더라도 이미 그 안에 그를 수 있는 씨앗이 깃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세상과 우주를 무판단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카르마(업장)는 아무런 판단이 없을 때 비로소 녹기 시작하는데 순간 순간 생각이 끼어 들어 이원성으로 시비를 가리게 되면 영원히 카르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선사(禪師)들이 속세에 나와 무슨 일을 하게 되면 속인들은 그들의 파격적인 행위를 보고 깜짝 놀라거나 이해를 하지 못하게 된다. 터부시 되는 고정관념에 박혀 수십년을 살아왔는지라 속인들의 에고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근세에 가장 파격적인 언사와 행동으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양반을 꼽으라면 단연 춘성(春成)스님(1891~1977)이다. 춘성은 만해 한용운의 유일한 제자로서 열세살의 어린 나이로 출가해 십여년 동안 만해 스님을 시봉했다. 화엄경을 거꾸로 외우고 다닐 정도로 불교 교리에 해박했던 춘성이지만 ‘교리공부 가지고는 깨우쳤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나이 49세에 한국 불교계의 최고 스타 경허 선사의 제자인 만공 스님 밑으로 들어가 조주의 무자(無字) 화두를 받아 3년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 로 정진, 드디어 깨달음을 얻은 대기만성의 표본이다.
이 양반은 평생을 무소유 정신으로 사는 한편 걸쭉한 음담패설의 육두문자를 써서 세인들의 꽉 막힌 고정관념을 날려 버리기로 유명했는데, 전해지는 일화로 이런 것이 있다.
6.25동란 직후 망가진 절을 보수하려고 산에서 나무를 베었는데, 사람들 신고가 들어와서 경찰이 연행해 갔다고 한다.
파출소에 잡혀온 춘성 스님에게 경찰이 묻기를...
"당신 주소가 뭐요?" 라고 하자
춘성은 "우리 엄마 보지다"라고 대답했다. 경찰이 속으로 이상한 사람 아닌가 해서 또 물었다고 한다.
"그럼 본적은 어디요?" 잠자코 듣고 있던 춘성 왈 "우리 아버지 자지다."
경찰은 춘성을 실성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다시 돌려 보냈다고 하는데, 무사히 돌아온 춘성을 보고 사람들이 의아해 여기자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그 녀석들이...내 말을 못 말아 들어.."
당연히 알아 들을리가 없다. 이건 단순히 춘성의 육두문자가 아니라 그 양반의 치열한 무소유 정신을 나타내는 촌철살인의 외침이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보지에서 태어나고 아버지의 자지에서 연유한 것 빼고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벌거숭이 춘성... 사람들이 왜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냐는 춘성 스님의 답답한 속울음이었던 것이다.
춘성 스님은 이외에도 육두문자 일화가 여러 개 있는데 얘기 나온김에 하나 더 해보자.
언제인가 춘성 스님이 기차를 타고 가는데 어떤 기독교 전도자들이 열차객실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란 피켓을 들고 큰소리로 외치며 지나가다가 마침 머리깎은 춘성 스님이 앉아 있으니 그 부근을 왔다갔다 하며 더욱 큰소리로 외쳐댔다고 한다.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다 3일 만에 부활했나니.."
이때 춘성 스님이 좌석에서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뭐~ 누가 죽었다 살아났다고? 이놈들아, 내 평생에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은 내 좆대가리 밖에 못 봤다!!"
이 일갈에 승객들은 폭소를 터트리며 깔깔대고 웃어대니 그 전도자들은 혼비백산 사라졌다고 한다. 보통의 헤아림을 가진 승려로서는 어림없는 언사가 아닐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춘성스님이 잘 쓰시던 ‘보지’ ‘자지’라는 말이 그렇게 상스러운 말이 아니다. 이것 역시 에고의 고정관념일뿐이다. 여지껏 받아왔던 사회의 교육과 터부가 본질을 가린 것 뿐이지 그 단어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다. 두 단어의 어원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아름다운 단어이기까지 하다.
보지의 어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볻"이 나오는데 '볻'은 뿌리나 씨(種)의 뜻을 가지고 있는 고어로써 아직도 동북아 일대에서 변형되어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이 '볻'은 다시 '볼'로 변하고 여기에 접미사 '옴'이 붙어 '보롬'이 되며 이것은 다시 'ㄹ'이 떨어져 '보옴'이 된다. '보옴'은 지금 우리가 현대어에서 사용하고 있는 '봄(春)'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지'와 '봄'은 결국 같은 말인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만물의 뿌리가 되고 모든것이 기지개를 펴는 향그러운 봄, 싱그러운 보지.... 터부시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볼' 얘기가 나와서 한마디 덪붙이자면, '볼'의 모음이 바뀌어 '불'로 변했는데, 이 '불'도 우리는 지금 고스란히 쓰고 있다. 남자의 성기를 지칭하는 '불알'이 바로 그것이다.
"돼지 불을 친다" "불두덩 한번 튼실하다"
이런 것들도 마찬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보지'와 남자의 성기를 뜻하는 '불'이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이웃나라 일본어에서는 여자의 성기를 "호도(hoto)"라고 하는데, 이 역시 어근 '볻(pot)'이 '보도(photo)'라는 과정을 거쳐 생성된 말이라고 한다.
남자의 성기를 지칭하는 좆과 자지도 근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아주 멋드러진 말이다. "좆"과 "자지"의 어근은 "잦"인데 'ㅈ'은 'ㄷ'에서 변한 자음이므로 따라서 "좆"과 "잦"은 "돋"과 "닫"이 조어가 된다. 일본 유구어에서는 남자의 자지를 "다니(tani)라고 하는데, 어근 단(tan)은 닫(tat)이 조어가 된다. 이 닫의 우리나라 원 뜻은 "씨(種)"다. 만주어에 "다림비(tarimbi, 씨를 뿌리다)"라는 말이 있는데, 어근 "달"이 씨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여기에서의 어근 "달"의 조어는 "닫"이다.
여자의 성기를 뜻하는 씹도 바로 이 ‘씨’에서 나왔다. 사전에서 '씹'을 찾아보면, "성숙한 어른의 보지"라고 되어 있는데, "어른의 보지"로서의 역할은 남자의 정액을 받아 아이를 만드는 초입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즉, 남자의 씨를 받는 입구인 것이다. 씨(種)의 입(口). 결국 "씹"은 "씨"와 "입"의 순수 우리말 복합어 였던 것이다.
두 말을 붙여서 발음 해 보라.... 씨입....씹.... 씨의 입이라.... 이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답다 못해 낭만적이지 않은가? 몸의 일부일지언정 의인화 시켜서 생각하는 우리 조상들의 인본적인 자세.... 왜 우리는 이 말을 터부시 해야 된단 말이냐?
명상과 선(禪)이 별게 아니다. 그저 생활 속에서 이런 언어와 생각의 고정관념을 타파하며 사물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그것으로 족하다. 살아 있는 서구의 성자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말에 의하면 현재 깨달음의 가능성은 과거 천년의 인간 진화에 비해 천배 이상 높은 것으로 그의 운동역학 테스트에서 드러났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예전 선사들처럼 삼사십년씩 토굴에 틀어 박혀 도를 닦지 않더라도 일상생활을 영위해 가면서도 얼마든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그 토대는 춘성스님과 같은 선구자들이 닦아 놓았으니 제대로 정신만 바짝 차린다면 많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음이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Written By Mulder 멀더의 명상 한자락 (www.occultist.co.kr)에
[참고문헌] 이희승 판 국어 대사전 (민중서림) 우스개 별곡 (서정범, 범조사, 1992) 수수께끼 별곡 (서정범, 범조사, 1987) 이바구 별곡 (서정범, 범조사,1988) 우리말의 상상력 (정호완, 정신세계사, 1991) 어원 이야기 (박갑천, 을유문화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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